고속도로 휴게소가 설날에 더 유명해지는 이유
매년 1월이나 2월이 되면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한 몸살을 앓습니다. 한쪽에서는 벅찬 가슴으로 고향행 기차표를 예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두통약을 챙기며 한숨을 쉽니다. 어떤 이에게 설날은 '1년 중 가장 따뜻한 밥상'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피하고 싶은 노동의 현장'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상반된 감정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이 그립지만 잔소리는 듣기 싫고, 조카들이 귀엽지만 세뱃돈은 부담스럽습니다. 도대체 가족이라는 존재는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토록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걸까요? 오늘은 3,000만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민족 대이동의 심리적 기원부터, 명절이 주는 확실한 행복과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쳐 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설날의 귀성길은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평소 4시간이면 갈 거리를 10시간 동안 도로 위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기름값, 톨게이트비, 피로도까지 계산하면 엄청난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어이 시동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DNA에 새겨진 생존 본능입니다. 인류학적으로 인간은 무리 지어 살 때 생존 확률이 높았습니다. 혹독한 겨울(설날 즈음)에 흩어진 혈연이 모여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고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수만 년간 이어져 온 생명 유지의 의식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맹수는 사라졌지만, "가족과 떨어지면 위험하다"는 무의식적 신호는 여전히 작동하여 우리를 고향으로 이끕니다.
두 번째는 정체성의 확인입니다. 도시에서 나는 '김 대리', '박 사장', '누구 엄마'라는 역할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고향 집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다시 '막내아들', '귀한 딸'이라는 원초적인 존재로 돌아갑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 뿌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은 부유하는 현대인에게 실존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가족 모임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조건 없는 수용입니다. 사회는 냉정합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도태되고, 실수를 하면 비난받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다릅니다. 내가 실직을 했든, 시험에 떨어졌든, 사업에 실패했든 부모님은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이 '정서적 안전기지(Secure Base)'에서의 재충전은 우리가 다시 험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회복탄력성의 원천이 됩니다.
또한 공동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너 어릴 때 똥기저귀 차고 다닐 때 말이야" 같은 뻔한 옛날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입니다. 나의 과거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형제자매와 함께 부모님의 늙음을 안타까워하고, 조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느끼는 유대감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설날만의 선물입니다.
이제 빛 뒤에 숨겨진 짙은 그림자를 볼 차례입니다. 설날이 누군가에게는 축제지만, 누군가에게는 노동 착취의 현장이 되는 현실입니다. 바로 독박 가사 문제입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문화가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부엌은 며느리와 어머니들의 전유물입니다. 남자들이 거실에서 TV를 보며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고스톱을 칠 때, 여자들은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맡으며 수백 장의 전을 부치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합니다.
가족 모임이 파국으로 치닫는 가장 흔한 원인은 바로 말(言)입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어색함을 없애려고, 혹은 정말 걱정이 되어서 던지는 질문들이 듣는 사람에게는 비수가 됩니다.
"취업은 했니?", "결혼은 언제 하니?", "애는 안 낳니?", "살 좀 빼야겠다", "연봉은 얼마니?". 이런 질문들은 한국 특유의 '가족 간 경계(Boundary) 불분명' 현상을 보여줍니다. 가족이니까 네 인생에 대해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고, 조언(이라 쓰고 훈계라 읽는)을 해도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특히 기성세대는 '걱정'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젊은 세대는 이를 '평가'와 '침해'로 받아들입니다. 이 인식의 간극(Gap)이 명절을 '가족 청문회'로 만들어버립니다. 즐거워야 할 식사 자리가 눈치 보기와 변명의 장으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는 "차라리 당직 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설날은 마음만 나누는 날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돈이 오가는 날입니다. 양가 부모님 용돈, 조카들 세뱃돈, 명절 선물 세트, 왕복 교통비, 차례상 비용까지 합치면 1월 월급의 상당 부분이 증발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묘한 비교와 경쟁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형님네는 50만 원 드렸다는데 나는 어쩌지?", "동서네는 한우 세트 사 왔네?" 하는 비교 심리는 가족 간의 열등감을 자극합니다. 형편이 어려운 형제는 부유한 형제 앞에서 위축되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얇아진 지갑 사정은 명절 후 생활고로 이어져 부부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음의 크기는 종종 봉투의 두께로 측정되기에, 설날의 경제적 출혈은 무시 못 할 스트레스 요인입니다.
설날 갈등의 가장 깊은 곳에는 가치관의 충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모 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공동체주의'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나 하나 희생해서 가족이 화목하면 된다", "힘들어도 다 같이 모여야 예의다"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반면 MZ세대를 포함한 젊은 층은 '합리적 개인주의'를 지향합니다. "나의 행복과 휴식이 우선이다", "불합리한 관습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강요된 효도와 일방적인 희생은 폭력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이 두 세계관이 정면충돌하는 곳이 바로 설날의 거실입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서로를 "이기적이다"라고 비난하거나 "꼰대 같다"고 무시하며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D.I.Y(Do It Yourself) 명절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차례의 간소화입니다. 성균관의 권고대로 전을 부치지 않고 과일과 떡국 정도로 상을 차리거나, 아예 차례를 없애고 가족 여행을 떠나는 집이 늘고 있습니다. 리조트에서 편하게 쉬면서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것이 조상님께도 덜 미안하다는 합리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역귀성과 따로 또 같이입니다. 자녀들이 고생해서 내려오는 대신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시거나, 설 당일 점심 한 끼만 외식으로 해결하고 쿨하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문화입니다. 며느리에게 "친정 먼저 다녀오라"고 배려하는 시어머니들도 늘고 있습니다. 이는 명절이 '의무 방어전'이 아니라 진정한 '휴식과 만남'의 시간이 되기 위한 긍정적인 진화입니다.
설날 가족 모임의 장점과 부담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관계 속에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난로 같은 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우면 뜨거워서 데이고, 너무 멀면 추워서 얼어 죽는 난로처럼, 가족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온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날에는 3가지만 기억하면 어떨까요? 첫째, 노동은 나누기. 전 부치는 며느리 옆에 앉아 같이 뒤집개를 드는 시늉이라도 합시다. 둘째, 질문 대신 경청하기. 취직, 결혼 질문은 삼키고 "요즘 힘든 건 없니?", "얼굴 보니 좋다"라는 공감의 말을 건네봅시다. 셋째, 다름 인정하기. 부모님의 서운함도, 자녀들의 피곤함도 모두 타당한 감정임을 인정해 줍시다.
결국 우리가 명절에 확인하고 싶은 것은 '형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떡국 한 그릇에 담긴 따뜻한 위로, 그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부디 이번 설날은 서로에게 상처 대신 반창고를 붙여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은 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어야 하니까요.
※ 이 글은 현대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명절 풍경과 인식을 바탕으로 심층 분석한 칼럼입니다. 각 가정의 고유한 문화와 상황에 따라 명절의 모습과 감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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