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산복 패션이 유행이 된 이유
예전엔 “당연해서 묻지 않던 일”이었는데, 요즘은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부터 먼저 무거워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차례라는 이름 아래 모였던 시간이, 왜 지금은 부담과 갈등으로 남는지—한 번 차분히 풀어보겠습니다.
예전엔 설날과 추석이 오면, 달력의 빨간 날짜가 먼저 반짝였던 것 같습니다. “쉰다” “모인다” “먹는다” 같은 단어가 앞에 섰고, 차례는 그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순서가 뒤집힌 분들이 많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속에서 먼저 계산이 시작됩니다. 이동 시간, 주차, 귀향길, 인사해야 할 사람들, 준비해야 할 음식, 나누어야 할 역할, 그리고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르는 작은 말 한마디까지요.
“나도 솔직히 이젠 대명절(추석, 설날)이 부담된다.”
이 한 문장 안에는, 게으름이 아니라 ‘감당해온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부담은 종종 죄책감으로 변합니다. “내가 이상한가?” “내가 못됐다” 같은 생각으로요. 그런데 부담이 생기는 데에는, 개인의 성격보다 시대의 구조가 훨씬 크게 작용합니다. 오늘 글은 그 구조를 차분히 해부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누구를 탓하려고가 아니라, 서로 덜 다치기 위해서요.
차례는 단순히 “옛날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가 유지되던 방식의 한 축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가족이 한곳에 더 밀집해 살았고, 노동과 생활이 지금보다 더 ‘집’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말하자면, 명절은 특별행사이면서도 동시에 ‘생활의 연장’에 가까웠지요.
대가족이 같은 마을, 같은 동네에 사는 경우가 많았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있는 시간이 일상적으로 쌓였습니다. 그러니 명절에 모이는 일 자체가 지금처럼 “큰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모임이 특별하지 않으니, 준비도 상대적으로 분산될 수 있었지요.
이 부분은 조심스럽지만,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과거에는 가사·제사 준비가 특정 성별과 며느리에게 쏠리는 일이 흔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로 명확히 말해지지 않던 시절이 길었습니다. 누군가는 부당함을 삼키며 견뎠고, 누군가는 그 구조를 “원래 그런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불편함을 말할 언어가 생겼고,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각도 자라났습니다. 그러니 같은 방식으로 명절을 유지하려 하면, 예전에는 넘어가던 것이 오늘날엔 ‘갈등’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조상이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떤 의미인지와 별개로, 차례는 “우리는 한 집안이다”라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명절에 모여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소속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소속감은 ‘따뜻함’이기도 하고, 동시에 ‘압박’이기도 합니다. 소속이라는 말이 아름답게 들릴 때도 있지만, 어떤 순간엔 그 소속이 개인의 삶을 누르는 무게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명절을 기피하는 이유는 “전통이 싫어서” 한 줄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현실의 뼈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달라진 뼈대 위에 예전 규칙을 그대로 얹으면, 무리가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예전엔 집안일이 ‘분산’되는 방식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 집에서 모든 준비를 떠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차례상을 크게 차리는 문화가 남아 있는 집일수록, 준비는 특정 가구의 체력과 시간, 지출로 집중됩니다.
설날과 추석은 이동 자체가 큰 프로젝트가 되곤 합니다. 장거리 운전, 교통 체증, 숙박 문제, 아이 컨디션, 반려동물 돌봄까지요. 여기에 “어디를 먼저 가야 하느냐” 같은 동선 갈등이 얹히면, 명절은 축제가 아니라 미션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차례는 마음을 다하는 의식이고, 누군가에게는 낯설거나 부담스러운 형식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신앙의 문제로 참여가 어렵기도 합니다. 문제는 “다름” 자체가 아니라, 그 다름을 말할 때 서로가 상대를 ‘무시한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사실 음식이 힘든 집도 많지만, 더 힘든 건 말과 표정과 분위기를 관리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의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오래 쌓인 상처를 건드릴 수 있습니다.
결혼, 출산, 취업, 집, 체중, 외모, 학벌, 연봉— 명절은 이런 주제가 가장 쉽게 올라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그냥”으로 끝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다음 명절이 오기 전부터 마음의 방어벽을 세우게 됩니다.
누가 더 많이 준비하는지, 누가 더 오래 서 있는지, 누가 더 먼저 일어나고 더 늦게 쉬는지— 예전에는 말하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명절이 힘든 이유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건, “노동의 배분”과 “감사의 부재”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고맙다” 한마디가 있으면 버틸 만한데,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면 사람은 지칩니다.
차례상 비용, 장보기 비용, 선물 비용, 용돈, 이동비, 기름값, 때로는 휴가를 쓰는 기회비용까지. 명절은 “쉰다”는 말과 달리, 지갑이 더 많이 열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마음으로 덮을 수 있는 비용도, 팍팍한 시기에는 심리적 압박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요즘 명절은 ‘정’의 이벤트이면서도, 동시에 ‘가계부’의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차례를 지내는 이유를 묻지 않고 자란 세대는, 의미보다 “절차”로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절차만 남은 의식은, 마치 이유를 모른 채 하는 숙제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평소에 관계가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명절만 만나면, 차례는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 아니라 어색함을 더 부각시키는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
“일이 많아서”도 맞지만, 많은 경우 그보다 더 큰 건 “일을 맡긴 방식”입니다.
준비는 몰리고, 평가는 없고, 말은 조심해야 하고, 마음은 꾹 눌러야 할 때—명절은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전통을 거부한다기보다, 오늘의 삶에 맞는 형태로 조정하려는 흐름이라고 말해두면 좋습니다.
사람들은 “없애자”보다 “덜 힘들게 하자”에 더 쉽게 마음을 엽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명절이 왜 힘든지 이유는 충분히 쌓였을 겁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건, 명절이 여전히 몇 가지 소중한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연락을 미루다가도, 명절이 되면 그래도 한번은 안부를 묻게 됩니다. 그 한 번이 어떤 집안에는 끈이 되고, 어떤 어른에게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는 신호가 됩니다.
차례를 하든 하지 않든, 명절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기억이 따뜻하기만 하진 않더라도, 사람은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완전히 버리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명절 그 자체가 아니라, 명절을 운영하는 방식이 현실과 맞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태를 조금 바꾸면, 명절이 다시 숨 쉴 공간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명절 갈등은 큰 사건에서 시작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폭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래 지점에서 자주 마찰이 납니다.
한 집에서 모이면 그 집이 ‘주최’처럼 보이지만, 명절 문화는 때로 “집안의 규칙”이 더 강합니다. 규칙이 강할수록, 개인은 숨이 막힙니다. 반대로 규칙이 약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가사와 준비가 특정 사람의 ‘본업’이 되는 순간, 다른 사람의 참여는 “도와주는 일”처럼 표현됩니다. 그런데 도움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부담을 기본값으로 깔아두는 말이기도 합니다. 말이 그럴 뿐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명절엔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이 많아집니다. 음식 간, 전의 모양, 상차림 순서, 절하는 방식, 그리고 말투까지요. 평가가 시작되면, 명절은 편안한 자리에서 시험장으로 변합니다.
결혼은 언제, 아이는 언제, 집은 샀니, 승진은 했니— 이런 질문은 “관심”으로 포장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비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받는 질문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크게 아픈 법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네가 알아서 해”는 포기처럼 들리고
“네가 편한 쪽으로 하자”는 배려로 들립니다.
명절은 그 톤 차이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시기입니다.
다들 힘든 걸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옛날부터 그랬어”가 아니라 “이번엔 어떻게 할까”를 말하는 집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차례를 없애야만 해결되는 집도 있고, 차례를 유지하되 “형태를 조정”하면 숨이 트이는 집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각 집이 감당 가능한 방식으로 현실을 맞추는 일입니다.
상차림을 줄이고, 절차를 간단히 하고, 시간도 짧게 가져가는 것. 이것은 조상에 대한 마음이 줄었다기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을 존중하겠다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피로는 “준비의 집중”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명절을 바꾸려면 감정부터 바꾸기보다, 구조부터 바꾸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필요하면 부를게” 방식은 거의 실패합니다.
필요할 때 부르면 이미 늦었고, 부르는 쪽도 미안해지고, 불린 쪽도 ‘손님처럼’ 움직입니다.
처음부터 역할과 시간을 ‘이름표처럼’ 붙이는 것이 훨씬 덜 다칩니다.
명절에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길수록 갈등 확률이 높아집니다. 부담을 줄이려면 ‘짧고 명확하게’가 도움이 됩니다.
차례의 핵심을 “음식”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본다면, 기억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준비만 분담하면 끝날 것 같지만, 사실 명절을 어렵게 만드는 건 대화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절에도 ‘대화 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례를 줄이거나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용기이면서도 동시에 기술이 필요합니다. 특히 어른들에게는 “정성”의 문제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빈자리에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안 한다”만 말하면 더 크게 충돌합니다. 대신 대안을 함께 제시하면, 대화가 현실로 내려옵니다.
어른들이 차례를 지키려는 마음에는, “가족이 흩어질까 두려움”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을 인정해주면, 형식은 협상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른들 마음도 이해해요. 다만 요즘 방식으로는 제가 너무 지쳐서, 오래 가려면 조금 바꾸고 싶어요.”
명절을 매번 ‘참고’ ‘버티는’ 방식으로 치르면,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그래서 “올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가능한 방식”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① 감사/존중 → ② 내 상태 설명 → ③ 대안 제시 → ④ 다음 일정 약속
이 흐름이면, “거부”가 아니라 “조정”으로 들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건 구시대예요” “왜 아직도 해요” 같은 말은,
논리적으로 맞아도 마음을 닫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명절 대화는 논리 싸움이 되면 거의 다 집니다. 관계가 먼저 상하니까요.
명절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순간, 어떤 분들은 스스로를 나무랍니다. “내가 예민한가?” “내가 정이 없나?” 하고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방식이 내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있나?”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이 방식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덜 미워하게 만들고 있나?”
잠을 못 자고, 계속 움직이고, 계속 웃어야 하고, 계속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건 휴일이라기보다 노동에 가깝습니다. 명절의 이름이 무엇이든, 몸이 무너지면 다음은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하고, 여기서부터는 쉬겠습니다.” 이 말은 관계를 끊겠다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오래 끌고 가기 위한 장치일 수 있습니다.
명절이 매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매년 덜 힘들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10을 0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10을 7로, 7을 5로 낮추는 식으로요. 그렇게 현실이 바뀝니다.
예전에는 차례가 가족을 묶어주는 끈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끈이 너무 조여서, 숨이 막히는 집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놓고 싶고, 누군가는 더 꽉 잡고 싶어합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명절은 “정답을 맞히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관계의 온도를 보여주는 자리라고요. 온도가 너무 높아 화상 입을 것 같으면 식혀야 하고, 너무 차가워 얼어붙으면 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온도를 조절하는 건,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명절이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이 감당해왔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 부담을 “참아내는 마음”이 아니라, “조정하는 대화”로 옮겨보셔도 괜찮습니다.
이 글이 명절을 ‘좋아하라’고 설득하는 글이 아니라,
명절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은 정리해주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이 막힐 때 그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문장을 남겨봅니다. 공격이 아니라 조정을 위한 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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